36. 이번 장에서는 모든 윤리적 원리들에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가장 유명한 주장, 즉 즐거움만이 유일하게 좋다는 원리를 다루어야겠다. 본 장에서 이 원리를 다루는 주된 이유는, 말했듯이 헤도니즘이 대체로 자연주의적 윤리학의 한 형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즐거움이 유일하게 좋은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돼 온 까닭은, 그 주장은 어떻든 ‘좋음’의 정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좋음’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져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도니즘의 성행은, 내가 자연주의적 오류(우리가 좋다는 말로 의미하는 어떤 고유하고 정의내릴 수 없는 성질을, 다른 구체적인 자연물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라고 부른 것에 의지해왔을 따름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또한 다음에도 강한 증거를 갖는 셈이다. 모든 헤도니즘 저술가들 중에서 오직 시즈윅 교수만이 우리가 ‘좋음’으로 의미하는 바가 분석 불가능한 어떤 것임을 명료하게 인식했으며, 만약 헤도니즘이 참이라면 헤도니즘의 주장들은 단지 자신의 자명성에만 근거를 둘 텐데, 이는 곧 ‘즐거움은 유일하게 좋은 것’이라는 명제를 하나의 직관이라 주장해야 함을 알았다. 그가 직관주의의 ‘방법론’이라고 불렀던 것이야말로, 공리주의와 에고이즘이 내세우는 대안적 ‘방법론’들과 함께, 그리고 그것들의 기반으로서, 존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시즈윅 교수에게는 새로운 발견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새로운 발견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고유한 속성[좋음]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즐거움에만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자신들이 기반으로 삼는 명제에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하고 일관되게 인식한 사람은 시즈윅 교수 이전의 헤도니스트 중에는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진리는 다른 모든 진리들과 무관히 독자적으로 진리인 것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직관될 수 있기 때문임을 알았더라면 이를 분명 강조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개념에] 내포된 가정을 분명하게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헤도니스트들이] 즐거움에 그토록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였는지 이해하기란 그러나 어렵지 않다. 헤도니즘은 윤리학을 깊이 생각해보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그 나름으로는 충분히 명백한 근거에 따라, 누구나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첫 번째 결론이다. 우리가 사물들에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아주 쉽다. 우리가 즐기는 사물들과 그렇지 않은 사물들은 두 가지 부류를 형성하고,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항상 향해있다. 하지만 어떤 것에 찬성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것을 즐거워 한다는 사실을 구분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마음의 이러한 두 상태를 직시한다면, 비록 그것들은 대체로 함께 일어나지만 분명 두 가지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측면에서 그것들이 다른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만족과 다른 만족들 사이의 차이보다(이 차이는 아주 분명하지만 또 분석해내기란 아주 까다롭다), 만족과 찬성이라는 두 상태의 차이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사물에 ‘찬성한다’는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사실은 ‘그 사물이 특정한 속성을 갖는다고 나는 느낀다’는 것임을 이해하기란 극히 어렵다. 그 속성은 곧 윤리학만의 영역을 규정짓는 것이지만, 어떤 사물을 즐기는 일에는 윤리학에 고유한 사유 대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최근 발간된 윤리학에 관한 어느 책의 표현에서 드러난 통속적인 실수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범해지는 실수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윤리적 사실은, 우리가 말했듯이, 어떤 것이 찬성 받거나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감각, 지각, 관념이라는 방식으로 특정한 사건을 이상적으로 표상하는 일은 기쁨이나 고통의 느낌을 포함하고 있다.’ 일상의 대화에서 ‘나는 이걸 원해’, ‘나는 이게 마음에 들어’, ‘여기에 관심이 있어’라는 말들은 ‘이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윤리적 판단들에는 서로 구분되는 부류들이 없고 오직 ‘우리가 즐기는 사물(things enjoyed)’이라는 부류만 있다고 가정하게 되는 오류가, 우리가 즐기는 것을 우리가 항상 찬성하지는 않는다는 흔치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는 이게 좋다고 생각해’가 ‘나는 이것에 즐거움을 느껴’와 동일하다는 가정에서, ‘오직 즐거움만이 좋다’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추론될 순 없다. 그러나 이 가정에서 무엇이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을지 이해하기란 아주 까다로운 반면, 위와 같은 오류 추론은 머리에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주제에 관한 저술들을 조금만 조사해 봐도 이러한 논리적 혼동이 얼마나 흔한지 보여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더구나 자연주의적 오류에는, 그 오류를 범한 사람이 ‘이것은 좋다’는 명제의 의미를 그것과 유사한 명제들의 의미와 구분하지 못하고 또 분명하게 인식하지도 못한다는 것 또한 포함 된다. 그 경우에 선에 관련된 유사한 명제들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