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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제 다음으로 헤도니즘이 원리로 삼는 직관에 대하여 고찰해보아야겠다. 이는 헤도니스트들 중에 시즈윅 교수만이 명석하게 인식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원리가 되는 직관은 증명.. 45. 우리는 이제 헤도니즘에 최종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헤도니즘을 옹호하는 밀의 자연주의적 논증을 반박하는 일에만 열중해왔다. 하지만 즐거움만이 바람직하다는 학설은 비록 밀의 그릇된 이론으로는 증명해낼 수 없었대도, 여전히 참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한 문제다. ‘즐거움만이 좋거나 바람직하다’는 명제는 밀이 처음엔 올바르게 귀속시켰던 부류의 명제, 즉 직접증명이 불가능한 제일원리에 속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밀이 또한 올바르게 말했듯 ‘지적으로 이 학설에 찬성이나 반대를 결정하도록 의견을 제공할 순 있다(p.7).’ 이렇듯 의견을 시즈윅 교수가 보여준 바 있고, 또 나는 이에 반하는 견해를 보이려고 했다. 윤리학적 헤도니즘의 근본적 명제인 ‘즐거움만이 목적으로 좋다’는 명제는, ..
44. 밀의 논증과 내 비판의 요약. 44. 그러니 밀이 자기변호를 하려면 다음처럼 말하는 편이 가장 나을 것이다. 밀의 두 가지 근본 명제들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사물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무엇이 됐건, 그것이 즐거움을 준다는 관념에 비례하지 않고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p. 58).’ 이 두 가지 진술은 모두 오류에 의존하고 있다. 첫 째, 자연주의적 오류에 의존하고 있고, 둘 째, 부분적으로 자연주의적 오류에 의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오류, 그리고 즐거움을 주는 생각(pleasant thought)과 즐거움에 대한 생각을 혼동하는 오류에 의존하고 있다. 밀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
43. 밀은 즐거움이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대상이라는 학설과 그렇지만 우리는 즐거움이 아닌 다른 것도 바란다는 자신의 인정을 조화해보려고 한다. 행복의 수단은 곧 행복의 ‘한 부분’이라.. 43. 지금부터 ‘행복은 인간 행동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입장을 옹호하려는 밀의 또 다른 논증으로 돌아가보자. 밀은 즐거움이 우리가 실제로 바라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는 말하길, ‘미덕을 바란다는 건 보편적이지 않다. 그러나 행복을 바란다는 건 진실된 사실이다.(p. 53)’ 그리고 ‘돈은 많은 경우에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바라게 된다(p. 55)’고 말한다. 밀의 이러한 인정은, 즐거움이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므로 또한 바랄만한 유일한 것이라는 앞선 논증과 아주 노골적이고 두드러지게 모순된다. 밀은 어떻게 이 모순을 피해갈 수 있을까? 그의 주된 논증은 다음과 같다. ‘미덕’, ‘돈’, 그리고 다른 대상들이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바라질 때, 그것들은 다만 ‘행복..
42.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즐거움 뿐이라는 학설은 욕망의 원인과 대상을 혼동한 데서 기인하며, 만일 즐거움이 언제나 욕망의 원인들 중 하나라고 해도, 그 사실이 곧 그것을 좋은 것이라 .. 42. 우리가 바라는 것은 언제나 즐거움이며, 즐거움이 모든 인간 행동의 보편적 목적이라 주장하는 것이 헤도니즘이라고 우리는 상정하고 있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다른 무언가를 바란다고 하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고 가정해보겠다. 가령 우리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바람을 이야기하고, 돈, 칭찬, 명예를 바란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의 중인 문제는 바람(desire), 그리고 바람의 대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또한 포함해야 한다. 바람(desire)이라 불리는 것과, 즐거움이라 불리는 것 사이의 필연적이거나 보편적인 관계가 여기서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다. 우리의 물음은 이 관계가 어떤 종류인가 묻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자연주의적 오류가 이에 수반되는지는 차치하고, 이 관계야말로 헤..
41. (2) 오직 즐거움만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 증명하려 든다. 41. 그러니 밀이 헤도니즘을 수립하려던 첫 번째 시도는, 단순하게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밀은 바라기에 좋은 것을 지칭하는 ‘바람직한’의 의미를, ‘바람직한’이 ‘가시적인’과 유사한 말이었다면 가졌을 법한 의미로 혼동하여, 좋은 것을 바라는 것과 동일시하려고 했다. ‘바람직하다’와 ‘좋음’이 동일할 때 가져야 하는 의미가 있고, ‘바라는 것’과 동일할 때 가져야 하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데 바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좋다는 밀의 주장은, ‘바람직한’의 두 가지 의미가 동일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만일 두 의미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자기모순을 범하게 되고,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헤도니즘을 증명하는 밀의 첫 단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이제 두 번째 단계를 논의해야겠다..
40. 그런데도 그는 첫 번째 명제에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는데, 이는 (1) “바람직한”과 “바라는 것”을 혼동하는 오류이며 40. ‘목적에 관한 물음은 곧 어떤 것이 바람직하냐(바랄만한 것이냐)는 물음이다. 공리주의 학설은 즐거움이 바람직한 것이며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라는 학설로,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만 바람직할 뿐이다. 이 학설이 주장하는 바를 기꺼이 믿게 하려면 무엇이 요구되어야 하는가? 이 학설이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에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본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주장에 관한 유일한 증명은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경험의 다른 원천(source)들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해하기에,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
39. 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행복은 목적으로 추구할만한(desirable)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주장한다 “궁극적 목적에 관한 물음은 직접증명 될 수 없다”. 39. 그러니 밀의 공리주의를 검토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해보자. 공리주의는 여러 윤리적 원리와 방법론들을 감탄할 만큼 분명하고 공정하게 논하고 있는 책이다. 밀은 충분히 심사숙고 하지 않고 윤리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단순한 실수들을 적잖이 범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헤도니즘의 원리에 관련된 것으로 밀만한 학자마저 범하게 된 실수들이다. 헤도니즘의 원리가 무엇인지 반복해서 말해보겠다. 그 원리는 즐거움이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유일한 것이고, 그 자체가 목적인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원리다. 이제 다시 밀에게 돌아가, 내가 기술(description)한 문제를 그가 인정 할 지 확인해보자. 최초의 언급에서 밀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즐거움은 목적으로 추구할만..
38. 본 장에서 밀(J. S. Mill)과 시즈윅(H. Sidgwick)을 비판하며 추구할 방법론은, 헤도니즘이 진리라 믿게 만드는 기반을 폭로하고 헤도니즘이 거짓임을 밝히기에 충분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38. 헤도니스트들은 즐거움이 아니라면, 그것이 행위이건 가치이건 지식이건, 그것이 삶이건 자연이건 아름다움이건, 오직 즐거움의 수단으로만, 즐거움을 위해서만 좋을 뿐, 그 자체가 목적으로, 그것 자체를 위해서라면, 결코 좋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아리스티포스(Aristippus)와 그가 설립한 키레네(Cyrenaic) 학파가 제기한 것이며, 에피쿠로스(Epicrus)와 에피쿠로스 학파와도 관련 있다. 그리고 현대에는 주로 ‘공리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가령 벤담이나 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허버트 스펜서는 자신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시즈윅 교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견해를 지지하는 철학자들 각자는, 그들이 헤도니즘이라는 ..
37. 헤도니즘은 ”즐거움만이 유일하게 좋은 것이다”라는 학설로 정의될 수 있다. 이 학설은 언제나 헤도니스트들이 주장해 온 것이며 그들의 근본적인 윤리적 원리로 이용되었다. 그들 자신.. 37. 따라서 헤도니즘은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의 한 형태이며, 헤도니즘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 때문이라고 상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즐거움만이 좋다’는 명확한 정의를 헤도니즘에 부여하려면, 우리는 자연주의적 오류가 무엇인지 간파하고, ‘좋다’는 말이 뜻하는 고유한 대상을 명확히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기에 내가 헤도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 학설을 공박하면서, 실은 아무도 주장한 적 없는 그런 학설을 공박하고 있다는 반박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지 분명히 자각하지 못하고 어떠한 학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또한 헤도니스트들이 자신들이 헤도니즘이라 부르는 것을 옹호할 때에, 본인들의 논증이 정당하다 가정하려면 그들은 마음속에 내가 정의내린 ..
36. 헤도니즘이 유행하는 까닭은 그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에 기인한다는 데에 있다. 36. 이번 장에서는 모든 윤리적 원리들에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가장 유명한 주장, 즉 즐거움만이 유일하게 좋다는 원리를 다루어야겠다. 본 장에서 이 원리를 다루는 주된 이유는, 말했듯이 헤도니즘이 대체로 자연주의적 윤리학의 한 형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즐거움이 유일하게 좋은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돼 온 까닭은, 그 주장은 어떻든 ‘좋음’의 정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좋음’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져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도니즘의 성행은, 내가 자연주의적 오류(우리가 좋다는 말로 의미하는 어떤 고유하고 정의내릴 수 없는 성질을, 다른 구체적인 자연물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라고 부른 것에 의지해왔을 따름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또한 다음에도 강한 증거를 갖는..